*자캐 등장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이후의 일을 상정합니다.
*얼마든지 수정/비공개 가능합니다.
*캐붕주의
그래서 이 늙은이가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평소보다는 미미한 미소를 습관적으로 띄운 낯으로 장기판 너머의 노인을 무심히 바라보며 주연은 생각했다.
심영재는 참 여러 의미에서 대단한 치다.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원체 타인에게 별 감상따위 품지 않는 주연이 이렇게까지 무언가 느끼게 하는 것에서도 알듯. 참 여러모로 비범한 작자다. 그러니 흉흉하고도 살벌했던 그때 그 시대……. 격동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무한히 흐르는 피와 쌓인 주검으로 그 지독한 역사도 내력도 그 몸에 스스로 새길 수 있던 것이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만인의 만상을 탐욕스레 취하여 제 영혼과 심장에 모조리 붙박고 또 박제하고……. 그러면서도 여지껏 지금까지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대한 대한민국의 음지의 중차대한 산증인, 혹은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고.
그 오래 전, 날것의 광기와 야만이 판쳤던 중정 때부터. 그의 뒤에 놓인 여럿 수석과 관리한 태가 나는 난들에 시선을 슬풋 옮기다가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득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도 그렇게…….
아니, 관두자. 그걸 또 꼬리를 물어 생각했다간 겉잡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또 기어이 의식해 버리고야 말았단 생각에 기분이 잡쳤다. 그러나 이걸 내색해 보이는 것이야말로 저 자에게 빌미 하나 던져주는 꼴임을 주연은 알았다.
장기판 너머의 노인을 바라보며 주연은 비소했다. 은근하고도 기민하게 자극하여 건드리는 꼴이 좆같다. 이런 감상을 심상에 이리저리 너질렀음을 간파당한다면 더더욱 좆같을 테고. 그리하여 다만 그는 미소지었다.
“그래서……. 이번 용건이 뭐기에, ‘영감’께서 또 친히 나를 보자고 하였지?”
“알잖은가……. 자네만한 대국 상대가 없어.”
침묵.
주연은 미세하게 이마 근육을 꿈틀였다. 되도 않는 허울을 언제까지고 한가로이 늘어놓을 작정인가. 그렇게 제 몫의 말들을 바라보고 가볍게 침음하다가, 이내 포를 들어 자리에 옮기며 말했다.
“뭐, 요즘 많이 적적하신가.”
“나이 먹은 늙은이 처지라면 으레 그렇지.”
그러니 자연히 공통된 주제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수양딸 이야기나 입으로 직접 꺼내 보이라는 건가. 의도가 훤하다. 딱히 숨기려고도 않았고. 심영재를 힐끗 바라본 주연이 포를 움직이자 그의 상이 이어 자리를 옮긴다.
분명 수를 물렀다. 주의를 흐트러뜨리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즉 먹히지 않고 판 위에 남아있는 제 몫의 기물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빤히 바라보다가, 자세를 고쳐 깊숙이 등받이에 기댄 채 주연이 툭 내뱉었다.
“용건.”
“점잔떨며 여유 부리던 본새는 대체 어디 내다팔았나?”
결국 낮고 걸걸한 웃음을 터뜨린 노인은 아랑곳않고 뇌까리는 것이다. 기실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자네 평소 의뭉떠는 모양새가 참으로 기꺼웠는데, 어쩌다 본색이 드러나 버린 후엔 시늉조차 않으니 원.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영영 파헤치지 말 걸 그랬나?”
아니, 그 반대지.
아.
오히려 영영 모르고 싶었다 해야하나.
갑작스런 오버랩에 결국 으레 짓던 미소가 미세하게나마 뒤틀렸다. 씨발. 심영재는 웃으며 장기판 너머로 그에게 서류를 건넸다. 남이라면 무심코 알지도 못한 채로 넘겼을 그것을 분명 포착한 것이 자명했다. 두 시선이 그대로 허공에서 교차했다만 일찰나였다. 서류 봉투를 무감히 해체하여 주연은 내용을 빠르게 훑는다. 작전 내용 개괄과 요약. 목적. 타깃명. 선정 이유— 대략적 정보들이 빠르게 요약되어 뇌리에 새겨지며 최적해를 도출해내는 프로세스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심영재가 주연을 어찌 바라보든 또 무슨 말을 하든 간…….
“—자네가 아니면 이런 대소사들 하며, 대국이며 누가 맡아준단 말인가. 그 아이도 유명을 달리한 판국에. 그 정도 죗값을 사지 자유분방한 채로 여기저기 자유로이 오가면서, 늙은이 심부름에 말동무나 가끔씩은 해주면 되는 식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벼이 치루고 있잖나, 자네는. 게다가 용돈도 쏠쏠히 받아타는 신세라면. 제법 분에 넘치는 처지 아닌가?”
“……방금 뭐라고 했지?”
“아…… 단가가 낮은 게 불만이었나?”
“적당히 하지그래. 그 전에.”
“그 아이가 유명을 달리하였다고.”
음. 설마……. 몰랐나?
심영재의 여상스런 말씨가 귓가에 고여 맴이 돌았다.